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 너머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 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 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길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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