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 황유원, '검고 맑은 잠' 중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3)

  
  
    
   따갑기만 한 봄볕 아래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
   수국이 피던 자리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았어
  
   지난 여름 어느 한 저녁, 어두운 골목에서 너는
   연초록으로 물든 수국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 하얗게 핀 네가 금세 연초록으로 변하던 순간
     넌 이제 수선화도 물망초도 아닌 연초록 수국  
    
   일방적 선언을 하였을 때,    
  
   수선화를 닮았던 네 표정도 함께 투명해졌어
   투명하기만 한 여름을 처음 맞아보기도 했어  
  
   지난 가을 어느 한 저녁, 어스름한 길가에서는  
   붉게 변한 수국을 보며 그때를 추억하기도 해    

   - 술병 하나를 곁에 놓아두고 함께 쓰러진 순간  
     그래도 넌 괜찮아질 거야 수국이 다 지는 동안  

   또 일방적 선언을 하였을 때,
  
   괜찮아지지 않을 거라 믿었고 내 말이 맞았고
   괜찮아지겠다던 너도 여전히 광화문에는 없고
  
   그래도 괜찮아질 거야, 믿고 있는 내 말이 맞고
   수국이 다시 피기 전까지는 계속 광화문을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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