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극곰은 아직 살아 있다
텅 빈 화면.
아무것도 있지 않음을 제일 먼저 꺼내는 여백. 고전적인 레토릭이다.
애니메이션 효과로 넘실대는 코발트빛 물결만 가득한 바다 배경 아래쪽에 덩그러니 떠 있는 하얀 유빙 조각.
고고한 북극의 햇빛 아래 마치 그것과 한 몸인 양 둥그스레 한 몸집의 네 발을 유빙에 착 붙여놓고 선 하얀 북극곰 한 마리.
형식은 우두커니 앉아 책상 밑 두 다리를 꼬며 한 평생의 시련을 담은 눈빛을 쏘아대던 누군가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기분으로 화면 속 북극곰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본다.
텅 빈 화면 속, 아주 작은 일부로써만 강조된 저 적막한 위기의 신호. 구도의 힘일까. 더욱 도드라진다.
저 짙푸른 망망대해가 곧 북극곰의 하얀 몸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서서히 집어삼키겠지. 아직은 그걸 모르는 북극곰의 태연하고도 평화로운 눈빛. 모든 종말의 직전은 어쩌면 가장 화려한 법임을 이렇듯 일깨우는가.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눈길을 끄는 네 글자의 메시지. 기후위기.
이렇게까지만 하면 마치 복극곰 멸종위기에 관한 홍보 페이지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혼자 중얼거린다.
에라, 모르겠다. 살짝 염려는 되지만, 어차피 혹독한 팀장의 재가가 떨어져야 앞으로 더 진행할 수 있는 작업인 탓에 굳이 더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진 않기로 하자.
인트로 화면은 총 세 개로 구성되었다. 맨 첫 화면에는 하얀 북극곰, 그다음 화면은 벌겋게 달아올라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지구의 풍경을 담은 컴퓨터 그래픽과 기후변화를 축약해 수치화한 각종 도표들, 마지막으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사진과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을 기업 홍보용 슬로건 문구 등이 배치됐다. 한참 유행하는 ‘ESG’라는 용어도 당연히 포함시켰다.
회의실에 조금 먼저 도착한 형식은 노트북을 다시 켜고 개발업체에서 보내준 디자인 시안을 하나둘씩 미리 꺼내놓는다. 재택근무 등으로 외부에서 접속하려는 팀원들을 위해서 화상회의 앱을 함께 켜두고 또 블루투스 스피커도 미리 연결시켜 놓고선 볼륨의 크기를 적당히 맞춰놓는다. 이들을 재빠르게 준비하는 동안 팀원들도 하나둘씩 차례차례 회의실로 입장한다.
회의를 시작할 차례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비교적 짧게 진행할 텐데요. 개발업체에서 제출한 디자인 시안을 검토하는 건입니다. 우선 오늘 제공된 시안은 시작 페이지에 관한 건으로, 총 3개의 화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자 해당 페이지별로 검토해 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함께 정리해 업체 쪽으로 피드백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팀장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벌써 21세기인데… 아직도 '북극곰 타령'밖에 대표할만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일순간 회의실 전체가 잠시 침묵에 놓인다. 이 공기, 익숙하다. 지금은 그저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듣기만 할 차례인 분위기라는 신호. 팀장은 항상 먼저 말을 꺼내기를, 누군가의 제지도 없이 한참 떠도는 편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마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 먼저 답을 구해놓을 게 뻔한 풍경이다.
이게… 딱히 대체할만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마땅치 않다는 게 업체 측 의견이거든요.
팀장은 잠시 듣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일단 한번 다시 보시죠. (화면을 맨 앞으로 다시 전환한 후에 또 잠시 쳐다보다가) 북극곰은 전체적으로 무난해 보여요. (웬일로?) 그런데, 두 번째 페이지는 기후변화를 표현한 모양새가 어째서인지 살짝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예전에 우리가 제시한 이미지랑도 좀 다르지 않나요?
우리쪽에서 제시한 이미지가 저작권법 때문에 업체 쪽에서는 아마 새로 이를 그린 모양예요.
저렇게밖에 못 그린다는 건가요?
네. 비교적 짧은 답변.
음… 알겠습니다. 넘어가시죠. (또 웬일?) 참,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는 (전환된 화면에서 맨 마지막 시안을 쳐다보면서) 음… 이건 적절한 것 같네요. 이걸로 가시죠. (다행이다!)
그러면 업체 쪽에도 그렇게 통보하면 될까요?
네. 대신에 두 번째 그림은 다시 좀 더 적절한 쪽으로 재작업을 요청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의견 없으신가요? (계속 침묵) 그러면 이렇게 정하는 것으로 하죠.
네. 그게 좋겠습니다. (한 팀원이 팀장의 말에 대뜸 동조한다.)
그러면 이걸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쏜살같이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간 회의실에 남아 형식은 주섬주섬 노트북과 케이블 등을 챙겨 정리를 한 후 맨 마지막으로 퇴실하면서 불을 껐다.
자리로 돌아온 형식은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업체 쪽으로 통화를 시도한다. 업체 측 개발 PM은 여러 사이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관계로 항상 전화가 연결되기 힘든 편이다. 이번에도 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클라이언트와 무슨 회의를 하고 있는 모양. 문자 대신에 메일을 써서 보내기로 한다.
업무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디자인 시안들은 대해 몇 가지 피드백을 전달해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전체적인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며, 첫 페이지는 시안 그대로 작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두 번째 화면에서의 기후변화 관련 내용을 담은 이미지는 원래 저희 쪽에서 제시했던 분위기나 뉘앙스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혹시 가능하시면 아예 다른 이미지 파일로 교체해주셨으면 하고요. 세 번째 페이지는 OK입니다. 혹시 추가로 질문이나 요청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짤막히 메일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이제 화면 맨 아래쪽에 배치하게 될 간단한 문장 몇 줄을 더 적기로 하는데 갑자기 또 일이 귀찮아졌다. 그새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이것도 어차피 이르면 오늘까지 아니면 내일까지만 해도 나머지 작업들은 이어서 마무리하면 또 그만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2023년 여름, 이미 사십 도를 예고한 서울의 폭염은 연일 계속되는 중이다.
형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 현관의 회전문을 통과했고 순식간에 화악 몰아닥치는 서울의 낮기운을 얼굴로 힘겹게 받아내며 걸었다. 전자담배를 켜고 스마트폰 화면에서 뉴스 앱을 구동시켜 엄지손가락으로 연신 화면을 스크롤한다.
뭐하고 있어? 누군가가 형식의 등을 슬쩍 내리친다. 뒤를 돌아보니 해외 현장에서 귀국한 지인이다.
어휴, 잘 귀국하셨습니까?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지난주. 일주일 쉬고 오늘이 첫 출근이지.
고생 많으셨네요.
고생은 뭘. 들어와 보니 본사가 더 힘들겠던데.
하하. 그렇긴 해요.
삼 년 전에 해외 현장에 부임을 했던 옛 기획실 선배 마동효 부장이다. 동유럽 현장의 한 프로젝트에서 현장소장을 맡았다는 건 인사발령 공지를 보고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귀국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출국 직전의 무렵에 잠시 그와 짤막한 통화를 나눴던 게 비로소 기억났다.
현장은 어떠셨나요, 삼 년 동안 계셨죠?
현장이야 뭐, 다 똑같지. 돌아와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아무튼 귀국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잘 돌아오셨어요.
그런 걸까? 하하. 이제 노년이 문제가 되겠지.
다들 그렇죠 뭐. 똑같아요.
다음에 보자고.
네.
퇴근이 다가올 무렵, 초여름의 저녁 시간.
업체 측으로부터 수정된 시안이 도착하진 않았다. 아마도 내일 아침에야 새로 받아보게 될 것 같다. 형식은 다시 노트북 PC 화면에 떠 있는 북극곰 한 마리를 또 꺼내서 한 번을 더 바라보기 시작한다. 첫 페이지다.
무섭다며 품에 안길 법한 부모조차 없는 채, 또 그렇게 맞서서 싸워낼 만큼 용기를 내서 품을 법한 새끼들도 하나 없는 채 그저 홀로 우두커니 저 망망대해를 무섭도록 떠돌기만 할 외로운 존재. 그리고 곧 다가올, 어찌할 도리도 없을 죽음의 운명조차 잠식해 버릴 만큼 철저하기만 한 고독의 무게감마저 저절로 함께 느껴지는 풍경 앞에서 형식은 잠시 별의별 생각들을 해본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인데. 코카콜라에서였을까, 아니면 설국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였을까.
애써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코카콜라는 조금 덜 슬프고 설국영화는 조금 더 슬펐지만, 적어도 대문에 걸릴만한 이미지로는 둘 다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덜 행복하다 해도 결국에는 죽음의 결말을 맞이할 차례이며, 또 조금은 더 행복하다손쳐도 어차피 결론은 바뀌지가 않는다.
북극곰은 그저 지난 시대의 공룡들처럼 멸종을 당한 개체로만 기억에 남게 될 존재일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목적도 없이 보람도 없는 긴 구도의 여정만을 겪고 있는, 어느 날 밤의 삼류 여인숙 방 안에서 옆 방의 남녀가 쏟아내는 격정을 묵묵히 인내해야만 했던 한 풋내기 승려의 적적한 모습이 저랬을까.
그건 마치 에어컨 하나 없는 꿉꿉한 독방 안에서 홀로 선풍기를 풍속 최대치로 놓고 쐬며 온종일을 라면 몇 봉지로 해결한 채 그저 헛된 필사와 습작만 거듭할 뿐이던, 그렇게 홀로 절망과 고독 속에 스스로를 파묻던 어느 여름날의 한 등단 지망생과도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지망생이 곧 자신이었음을 깨닫던 형식은 그래, 그래서 익숙했던 거구나.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아차, 하면서 이내 도로 노트북 화면을 닫는다. 노트북 전원을 서둘러 끄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짐들까지도 함께 개인 사물함에 고스란히 이동시켜야 할 자율좌석제의 퇴근시간이 갖는, 아주 익숙해진 습관이다.
다시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형식의 머릿속엔 또 다른 문장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걸 중얼거리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막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서서히 열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형식은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스스로한테 방금 생각했던 그 문장을 잊지 않으려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소설가는 저 북극곰과도 닮았어. 그 잔혹한 운명을 얘기해볼까.
북극곰은 아직 살아 있다. 저장 버튼을 눌렀다.
2. 드러난 위기, 다가올 위협
이튿날 아침.
형식은 평소와 똑같게 오전 9시 20분경에 사무실에 도착을 했고, 좌석예약 앱으로 미리 지정해 놓은 사무실 맨 가장자리의 창가 쪽 자리를 향해 걷는다. 자율근무제 실시에 따라 형식의 하루 일과는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6시 30분까지의 총 9시간으로 표준근무제보다는 삼십 분 늦게 시작해서 삼십 분 늦게 끝난다.
오늘도 옆자리를 예약해 둔 직원은 어제랑 똑같은 한 프로젝트 소속의 엔지니어다. 건축설계를 전공한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에 형식은 슬그머니 좌석에 크로스백을 내려놓고 복도 끝에 있는 개인 사물함 구역으로 이동을 해 자신의 사물함에 보관 중인 노트북과 자잘한 집기들을 함께 꺼내 좌석으로 다시 향했다. 이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좌석에 배치한 후, 비로소 노트북의 케이블을 연결하고선 전원 스위치를 켜 바로 부팅을 시작했다.
그룹웨어에 접속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내 게시판을 켜서 주요 공지사항을 확인하는 일과 아웃룩에서 간밤에 도착한 메일들을 빠르게 확인하는 일이다. 지난밤에도 각종 뉴스레터들이 도착해 있고 또 오전시간에 일찍 누군가가 보낸 업무메일들도 여럿 눈에 띈다. 형식은 이들을 하나씩 재빨리 확인하면서 화면을 스크롤한다.
이런 평범한 일과보다도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지난 주말에 터져 나온 그룹 내 재무상태에 관한 뉴스들이었다. 그룹 내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이 부진해졌고 또 각종 투자들의 성과 역시 기대에 못 미친 까닭에 그룹 전체의 시가총액이 지난 한 달 동안 무려 14%나 빠졌다는 증권가의 소식들이 제일 꺼림칙한 내용이다.
더구나 가장 예민할만한 소식은 다름 아닌 형식의 팀과도 관련이 있을 법한 내용인데, 자세한 내용인즉슨 그 주력 계열사 중 한 곳인 프로젝트의 발주처 회사도 올해에 불어닥친 자금경색과 공급과잉 국면에 따라 당분간 모든 투자계획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곧 형식의 팀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도 순식간에 유보될 가능성을 더한층 높였다.
물론 예고된 부분들도 많다. 이미 전통산업에 해당될 석유화학 업종의 경기 사이클이 좋지 못하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더구나 이들은 곧 ‘화석연료’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들도 잦았다. 향후 이 사업들이 아예 문을 닫을 가능성도 꽤 여러 차례 제기된 바가 있었다. 물론 당장 급격히 변화할 부분은 아니지만, 이미 여러 차례 조사한 결과가 보고되었고 그 대안을 찾느라 고심 중이라는 소식도 자주 접했다.
산업의 생태계가 한꺼번에 크게 요동칠 거다. 더 이상 과거의 승자가 미래의 승자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었던 담화들인데, 이토록 빠르게 피부에 와닿는 얘기들이 될 줄은 몰랐다.
형식은 웹브라우저의 구글 뉴스검색을 통해 수소에너지, 분산에너지 같은 키워드로 가장 최근에 올라온 뉴스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 주 동안 또 얼마나 소식들이 나왔을까. 검색결과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한 주 동안 제법 많은 분량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정기적으로 이들을 긁어 모아 사이트에 배치된 게시판에 옮겨 담는 일도 형식의 몫이다.
지난 한주 동안 해당 키워드로 검색된 뉴스들은 십여 개 정도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 얼마 전에 국회를 통과했다는 분산에너지 특별법 관련 소식들과 그에 따른 산업계 전망 등을 간단히 내비친 분석기사들이다. 명분은 마땅하고 어차피 가야 할 방향임에도, 아직까지 매력적인 사업성을 전혀 구현할 수 없다는 게 현재 이 비즈니스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요 한계임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다.
다시 형식은 이번에 개발된 베타 페이지로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관리자 전용 페이지에서 로그인을 했다. 게시판에 올릴 글과 프로젝트 소식들 또 각종 계정정보 등을 한꺼번에 관리할 수 있도록 별도로 개발해 놓은 페이지다.
무엇보다 큰 관심사는 방문자 통계.
상용 솔루션을 임베드한 형태로 개발되었는데, 지난 기간 동안 사이트를 방문한 유형과 접속한 내용 및 이력을 일일이 집계하고 분석해 볼 수 있는 기능들을 갖추고 있다. 형식은 지난 기간들을 각각 주 단위, 월 단위 등으로 바꿔가면서 이에 따른 방문자 통계들을 여러 차트들을 하나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주 단위로는 약 백여 명 남짓한 숫자들이 주로 눈에 띈다. 월 단위로도 수치는 엇비슷해 가장 최근의 숫자들과 지난 몇 달 동안의 숫자들이 크게 다르지 않음도 알 수 있었다.
큰일이네. 형식은 혼자서 또 중얼거린다.
사이트의 방문자 수가 이토록 저조하다면 무언가 다른 곡절이 있는 게 분명해진다. 단지 마케팅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 오프라인 방문과 미팅들을 드라마틱하게 줄여본 적도 없었기에 이 저조한 수치들이 갖는 ‘대표성’을 아예 도외시하긴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뭘까? 아무래도 세그먼트가 갖는 한계다. 국내의 모든 시장규모에 비해 고작 3% 남짓한 사정이 제일 큰 연유로 읽힌다. 더구나 B2B 사이트인 만큼 각 회사별 담당자 숫자 역시 지극히 한정적일뿐더러 웬만큼 흥미 있을 소재를 지속적으로 유입시키지 않는 이상 한두 번 구경 삼아 방문하는 게 고작인 게 어쩌면 더 당연한 현상 같기도 하다.
상품의 유형을 더 늘려 잡는 일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진 않다. 이미 일부 상품들은 다른 사업조직에서 한창 개발 중인 관계로 그대로 갖다 끼워도 무방할 성싶었다. 다만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세그먼트들을 굳이 한꺼번에 엮는다고 그 파이가 과연 얼마나 더 커질 수 있을까는 여전한 의문으로 남는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저녁. 형식은 팀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모처럼 갖는 술자리. 코로나 시국이 끝난 직후에야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 시내 상점들의 경기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지만, 그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듯 오가는 술집들마다 반가운 사람들끼리 북적대며 연신 시끄러운 풍경들이다. 형식은 소주잔에 술을 따라 혼자 원샷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챗GPT라는 게 그리 대단해? 이건 마치 인공지능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것처럼들 말해서.
네, 당연하죠. MS가 윈도우에도 심기로 했으니 조만간 우리들 모두 각각의 개인 비서를 컴퓨터 옆에 두고 일하게 되는 셈이 될 겁니다.
그 정도야? 아직 많이 똑똑하진 않다고들 하던데.
언어모델인 만큼 가르쳐준 만큼만 똑똑해지니까요. 몇 년 안 걸릴 것 같아요.
그래? 이거 참, 반가울 일인지 내 자리를 뺏길 불행스러운 일인지도 잘 모르겠어.
둘 다일 겁니다. 하하.
얼추 술자리가 제법 몇 순번을 돌고 나니 조금씩 취기가 오른다. 요즘의 회식들은 하도 일찍 끝나는 경향이 있어 오늘 술자리도 이 1차만 끝내고 각자 집으로 향하기로 정한다. 마지막 술잔.
문 과장님, 저번에 그린 장표 정말 잘 만드셨더군요. 많이 배웁니다.
뭘, 그런 걸 갖고. 많이 그리면 누구나 잘 그릴 수 있어.
그런가요?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마케팅 플랫폼은 요즘 어떻습니까?
망했어. 글쎄... 요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세그먼트가 너무 작지 않나 싶어. 국내 산업단지들의 총개수도 1천 개가 채 안되는데 그중에서도 보일러 연한 30년을 넘은 곳들의 숫자는 훨씬 더 적을 테지.
음... 그렇겠군요.
뭘 더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세그먼트를 어떻게든 확장시킬 필요가 있어.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대형 수요처들 중 데이터센터도 있던데? 그런 세그먼트의 시장규모도 함께 잠재적 시장으로 포함시키면 어떨까 싶어.
네, 맞아요. 그런 생각이 통하는 거죠. 잘하고 계십니다.
잘하긴. 혼잣말로 부인을 하며 형식은 혼자 술잔을 마저 비워냈다.
각자 퇴근을 해 집으로 돌아온 저녁.
형식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랑 김 한 봉지를 꺼내든 채 TV 리모컨을 찾아 켰다. OTT 서비스 채널들을 한참 검색하다가 어젯밤에 방영된 드라마를 선택하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1987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을 해 미래의 살인자를 쫓는 추리극이다. 드라마의 전체적 분위기가 흡사 실제 1987년의 그것과도 꽤 닮아서 흥미롭게 지켜보던 드라마였다. 졸음이 쏟아지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후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형식은 그만 소파에 드러눕는다. 안 되겠어, 자야겠어. TV를 도로 끈다.
형식은 잠들기 전에 아까부터 생각해 둔 내용을 검색해 보려 노트북을 켰다. 리눅스민트의 배경화면이 금방 나타나면서 새로 설치한 구글 크롬이 실행된다. 형식은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했다. “챗GPT 소설가”
찬찬히 검색결과를 살펴보던 형식의 눈에 “인공지능의 두 얼굴, 챗GPT와 함께 소설 쓰기 과정은 이랬다”는 제목의 기사가 들어온다. “도입무 쓰는 데 3초”라는 경이적 문구도 있었지만, 직접 챗GPT를 활용하면서 창작을 해봤다는 기사가 더 먼저 끌렸다. 단편소설집을 펴낸 저자 7명 중 한 명이 ‘ChatGPT-3.5’라고 씌어 있는 책에 관한 기사다. 소설을 장면별로 쪼개 주문을 했고, 세계관 구성의 아이디어를 얻고, 등장인물 이름을 요청하는 등이었다니 놀랍긴 하네. 형식은 혼자 중얼거리며 읽는다.
한꺼번에 쓰라고 하면 못 써요. 소설을 8단계로 나눠 단계별 결과물을 얻어 취합했어요. 바다에 잠긴 도시는 잃어버린 터전인데 챗GPT가 제시한 해저 도시 묘사는 경이로움 자체예요. 보조작가를 쓰는 것처럼 도움이 되죠. 언젠가는 작가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작업이 일상화될 수도 있겠죠.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오랫동안 눈에 밟혔다.
3. 소래산에서 동태탕을 먹다
월요일 아침.
형식은 느지막이 잠에서 깨 일단 세수를 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차를 몰고 이른 아침부터 카카오톡으로 일정을 미리 정한 영근네 집으로 향할 참이다.
지난번에 영근이 형식네 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한 시간 반. 대중교통인 만큼 대기시간도 길었고 버스도 구불구불한 경로를 따라 오려니 제법 시간이 걸린 편인데, 오늘 자동차로 이를 만회해 볼 요량이다. 그래도 초행길이니 넉넉히 한 시간 전에는 출발을 해야겠지. 형식은 차를 타고 곧장 고속도로 IC로 향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약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수도권순환도로의 IC에 진입을 하면 금세 시원한 질주가 가능해지고 이내 한강을 건넌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물결들을 잠시 바라볼 수 있는 짧은 순간임에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잠시나마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게 형식한텐 큰 즐거움이다.
영근이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지도와 설명을 따르면 곧 시흥 IC를 거쳐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통행료를 지불한 차는 금세 시내 도로에 진입했고, 몇 분 안에 도착한 좁은 골목에서 함께 사진으로 미리 봤던 한 식당 간판이 사진이 아닌 실물 모양 그대로 눈앞에 보였다. 여기구나. 도착했다.
형식은 잠시 기다리다가 담배를 피워 문다. 이 놈의 담배, 이젠 끊을 때도 됐는데, 하며 아직 운동복 차림인 채로 영근이 나타났다. 먼발치서 슬리퍼를 끌면서 다가오는 영근한테 형식은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 작년의 동기모임 이후로 처음 만난 얼굴.
어떻게, 금방 왔네. 와, 고속도로를 타니 금방이네.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
내가 가깝다고 했잖아. 바로 출발할까? 어디로 가는 게 좋겠어?
인천대공원 가볼래? 아, 저번에 함께 갔었지! 그럼 소래포구가 어때?
그래, 좋아.
둘은 다시 차를 타고 함께 소래포구로 향했다.
소래포구는 몇 해 전의 큰 화재로 시장은 이제 새 건물로 바뀌었고 다행히 복구는 완료된 풍경이다. 해산물을 가지런히 내놓고 연신 손님을 부르던 상인들이 서 있고, 왁자지껄한 골목 어귀엔 군데군데 주린 배를 채우느라 식당마다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형식과 영근은 여러 번이나 그 골목길을 서성이다 결국 어느 한 생선구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간단했다. 온갖 생선들을 모둠식으로 섞어 구워주는 백반인데, 막 연탄불에서 구워 나온 생선들이 맛나게 생겼다. 형식과 영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밥 한 공기씩을 뚝딱 해치웠다.
여기 맛있네. 가격 대비 성능은 최고. 원래 회를 먹을까 했는데 네가 운전을 해서.
그러게, 좀 아쉽네. 아니야, 다음에 먹지 뭐.
그래.
식사를 마치고 도로 시장을 빠져나온 둘은 이제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 쪽으로 걸었다. 드넓게 펼쳐진 뻘들 사이로 빼곡히 세워진 아파트들 뿐. 수도권 주변에서 이제 웬만한 공터들은 온통 아파트들로 채워진다. 땅이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꼭 그렇다고 믿진 않았다. 좀 더 좋은 장소들은 항상 공사 중이었고, 반대로 교통이 좀 불편한 곳들은 수십 년 전 모습 그대로인 채로 방치된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았다. 자, 다시 출발하지? 그래.
소래포구에서의 점심을 등 뒤로 한 채 둘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제 어디로 가? 시흥으로 돌아가야지.
둘을 싣고 자동차는 제법 미끄러지듯이 도로를 빠져나와 큰 전용도로에 진입한다. 시흥까지는 불과 십여분. 제3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시흥에서는 또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영근이 말했다. 목감 가는 쪽으로 조금만 더 가보자.
한창 공사 중인 야산이 있었고, 드문드문 새로 생긴 카페들이 제법 눈에 띈다. 아마도 새롭게 조성되는 장소인 모양이다. 영근의 안내에 따라 형식은 비포장 언덕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리며 이윽고 어느 한 카페 주차장에 도착했다. 내가 인테리어를 해준 곳이야. 사장님이 잘 알아.
차에서 내린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했고, 십여 분을 기다려 커피 두 잔을 받은 다음 곧장 카페 바깥에 설치된 간이 탁자로 향했다. 주변에선 온통 시끄러운 포클레인 소리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그리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시간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았다.
올해에만 다섯 군데 정도 냈어, 내볼 곳은 다 내봤어.
그래, 언젠간 너도 당선할 날이 있겠지. 안 돼도 괜찮고.
안될 가능성이 더 높아. 다 떨어졌다고 생각해. 그래서 독립출판도 함께 생각하는 중이고.
그래, 아무렴 어때. 책을 낸다는 게 더 중요하지.
영향력은 차이가 좀 큰데, 나도 그리 생각해.
난 그것도 좋게 봐.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이잖아. 그런데 저녁은 뭐 먹을래?
저번에 얘기한 동태탕집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거기가 기대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라… 동태탕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뭐. 난 괜찮아.
영근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형식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주변은 온통 공사장뿐인데 휴일임에도 포클레인들이 연신 흙을 퍼담아 나르는 통에 온 사방이 시끄러웠다. 둘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차를 타고 흙탕길을 금세 빠져나와 다시 포장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널찍한 도로의 맨 끝에서 산마루 하나가 보였다. 저 산이 소래산인가 보네. 응 맞아. 둘은 잠시 소래산과 주변의 산동네들이 그려놓는 정경을 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원히 뻗은 도로를 달려 소래산까지 닿은 건 오래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영근네 집이 곧 소래산 기슭인 셈이다.
동태탕집은 영근네 집 근처였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내 담배를 나누어 피웠고 마치 197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색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양원동태탕”이라고 써놓은 한 허름한 식당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동태탕 3인분 주세요.
네.
둘은 구석진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함께 모이기로 한 천신은 아직 연락이 없다. 역시 휴일임에도 가장 바쁜 사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그도 오늘이 어쩌면 평일보다는 훨씬 더 피크치에 도달해 있으리라. 영근이 먼저 전화를 건다.
나야, 그래 몇 시쯤에 도착할 수 있겠어? 그래, 알았어.
언제쯤 온대?
어, 삼십 분 정도 더 걸린다고 하네.
그래, 그 정도면 양호하네.
둘은 반찬들과 함께 나온 물수건으로 손을 씻고 물을 한잔씩 나누어 마셨다.
대뜸 도로 경제 문제를 화두로 꺼냈다. 하는 일은 좀 어때?
어, 잘 돼가고 있어. 다음 달부턴 경주로 내려가. 그 회사 사장님이 경주에 있거든. 본래 직업은 치과의사래.
오, 그래?
운이 좋았던 거지 뭐, 날 좋게 보더라고. 지난 한 달 동안 내내 트랙터 운전하는 법 배웠는데, 이게 또 경운기랑은 아예 달라.
그래? 난 하나도 몰라.
경운기는 정말 알면 알수록 위험한 거야. 이건 막 사람도 올라타. 누구라도 경운기 운전한다고 하면 말려야 돼.
전혀 모르던 사실이네.
비로소 문을 열고 천신이 등장했다.
와,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어, 너도.
그렇게 셋이 모여 주인아주머니께 술잔과 수저를 하나 더 부탁하고, 곧이어 셋은 건배를 했다.
동태탕, 오랜만이네. 여기가 괜찮은 집인가 보네?
아니야. 주변에 아는 집이 여기뿐이라.
아, 그래?
천신은 술 한잔을 들이켜자마자 막 끓고 있던 동태탕을 한 국자 퍼서 앞접시에 담고 먹어본다.
맛있네.
그래? 우리도 빨리 먹자.
형식과 영근 역시 곧 한 국자씩 자기 앞접시에 동태탕을 담고 살점부터 발라 먹기 시작한다.
형식은 곤이를 좋아한 편이어서 대뜸 접시에 담긴 곤이를 살짝 집어 입에 넣는다. 살짝 고소한 냄새와 함께 입 안에서 곤이를 씹는 동안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입 마셔본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살점을 떼어내 한가득 입 안에 넣는다. 푸석푸석하면서도 향긋한 동태의 속살이 입 안에 대뜸 군침을 고이게 만든다. 맛있다.
오길 잘했네.
그러게. 얼른 먹어 둬. 이제 일본 놈들이 동해에 핵 폐기물을 방류하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뭐, 동태탕뿐만이 아니지만.
다들 과묵해진다. 상식적이지 못한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일 거야. 형식은 혼자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더는 말을 않고 동태의 살점 하나를 입 안에 넣는다. 그렇게 셋은 대화를 생략한 채 아낌없이 동태탕을 나누어 먹었다. 뜨거워 입김을 호호 불면서도 큰 양푼을 올려놓은 버너는 끄지 않은 채 계속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게 만들었다. 연이어 술잔들이 오가고 금세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천신이 먼저 물어봤다. 그래서 경주는 언제 갈 건데?
어, 원래 다음 주초에 가려고 했는데 좀 늦어질 것 같아. 내달 초. 저쪽에서 기숙사 문제가 아직 해결 안 된 모양이야. 그래서 좀 기다려야 해.
그래. 아무튼, 가서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이제 사장님이 되겠네. 그래도 기술을 배워 창업한다는 게 어디야. 나도 빨리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뭐라도 빨리 터득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맞아.
회사에서도 일과시간 때마다 불쑥불쑥 불안해하던 감정들이 결국 해법으로 제시한 건 어서 이 희망고문을 탈출하기 위한 방편이요 그건 곧 무언가라도 자격을 얻어 스스로 사업을 하는 방편뿐이라는 걸 모두들 잘 알고 있다. 그게 과연 소설가일 수도 있을까. 형식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번엔 형식네 회사 얘기.
회사는 요즘 좀 어때?
늘 그렇지 뭐. 요즘은 무슨 사이트를 만드는데 사업이야 나중을 보고 하는 거니까 크게 문제는 안되는데 당장에 수주가 잘 안 되고 지금 사이트도 방문자가 턱없이 모자라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중…
그래? 우리라도 사이트를 하루에 한 번씩 방문해 줄까? 하하.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도통 사이트에 방문을 안 하는데 이걸 무슨 수로 홍보하지?
천신이 대뜸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사이트 방문 수가 저조한 건 사이트 문제가 아닐 수 있지 않아? 그 사이트가 담는 내용이 와닿지가 않아 그럴 수 있다고 봐. 나도 예전에 학원 홈페이지를 개설했는데 다른 학원도 그렇고 거의 방문자가 없거든. 학원 홈페이지라는 게 뻔하잖아. 볼 게 없다는 거지. 가뜩이나 볼 것 많은 세상인데 재미없는 사이트를 굳이 왜? 이럴걸.
음… 맞는 말이네. 그럼 어떡하면 돼?
글쎄, 내 경우는 일단 좀 더 아이템을 확장해 보면 어떨까 싶어. 학원 홈페이지도 처음엔 내가 가르치는 과목 위주로만 신경 썼었는데 나중에는 아예 종합학원처럼 모든 과목을 다 섹션별로 나누고 거기에다 과년도 기출문제집을 함께 올렸더니 서서히 반응이 오더라고. 지금은 처음 열었을 때보단 대략 서너 배쯤은 더 방문자가 많아졌어.
그래? 그게 중요하겠네. 아이템 확장. 나도 회사에다 그런 비슷한 얘길 한번 해봐야겠네.
응. 아무래도 아이템이 풍부한 게 오가는 사람도 많아지지. 아무래도 B2B면 더더욱 아이템의 확장성이 중요하지.
맞아, 나도 예전에 인테리어만 따로 운영하니까 그다지 많이 않았었는데 각종 시공이며 견적 같은 걸 함께 메뉴로 구성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그래, 알았어. Thanks.
문득 다시 동태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동해 바다를 한없이 자유롭게 헤엄치던 명태들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하나둘씩 차츰 없어지더니 이젠 아예 우리나라 영해에선 잡히지도 않고 북극해 인근으로까지 죄다 밀려났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얘기도 무려 십수 년 전의 얘기다. 우리들의 식탁 위에 오르는 동태들도 대부분 북유럽 인근에서 잡힌 고기들이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됐다.
하물며 수온 하나 때문에도 그렇게 쫓겨난 명태들인데 이젠 아주 핵 폐기물이 담긴 끔찍한 조류가 러시아 인근까지를 침범해 그들을 또 어디까지 몰아낼 것인지도 더 이상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더구나 그 혹독한 환경에서 용케 살아남았다손쳐도 결국 식탁 위의 정겨운 반찬과는 영 거리가 먼 흉물스러운 존재로만 남게 될 공산이 더 커졌다.
그런 생각들을 좀 하다 보니 대뜸 술부터 당기게 된다. 형식은 다시 소주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삼켰다.
다들 일찌감치 자리를 파하자면서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형식과 영근은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식당 가장자리에 있는 처마 끝에 나란히 섰다. 형식은 전자담배를 한 개비 끼워 물었고 영근은 연초로 된 담배를 하나 꺼내서 불을 붙였다. 매캐한 냄새가 공기 안에 퍼진다.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내리는 밤이다.
그래, 경주에서 잘 지내고. 한번 놀러 가겠다는 얘긴 못했다. 너무 멀기도 하고.
두 달 후면 다시 올라와. 그때쯤에 다시 봐.
그래.
다들 손을 흔들며 서로를 배웅했고, 비를 피하면서 옹기종기 우산들 속으로 숨었다. 형식은 슬리퍼를 끌면서 다시 영근과 함께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 돌아가겠네?
어, 괜찮아. 난 내일도 연차니까.
그래, 오늘 잘 먹었고. 잘 쉬어.
응.
집에 도착한 영근과 헤어진 형식은 이제 혼자 나머지 골목길을 마저 걷는다.
영근네 집 앞에 세워둔 차를 잠시 쳐다본 후 좀 더 큰길이 있는 골목까지 더 나아갔다. 주변은 아직 가로등이 환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탓인지 오가는 행인들은 눈에 띄질 않는다. 먼발치에 여관 간판 몇이 보인다. 형식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여관을 찾았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3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형식은 옷을 벗고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한 다음 이내 침대로 향했다. TV를 켜니 예전 드라마를 다시 방송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켜둔 채로 형식은 방 안에 비치해 둔 PC를 켰고 인터넷에서 다시 블로그에 접속했다. 아무래도 아까 생각하던 동태 이야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제목은 뭐라고 할까. 동태를 걱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동태의 안부’는 어떨까. 형식은 내키는 대로 이내 그렇게 제목을 붙인 시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4. 두더지의 가능성을 찾아서
새로운 아침. 연차의 마지막 날.
형식은 이른 아침부터 몸이 불편해 잠을 깼다. 술을 마신 다음날 새벽이면 으레 겪는 일이다.
여관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커피포트의 물을 끓여 인스턴트커피를 한잔 타서 마신다. 여전히 속은 더부룩하다. 찬 물도 두 컵 정도를 마셨다. 그랬더니 조금은 나아진 듯하다. 어젯밤에 사다 놓은 컵라면 하나에 물을 붓고 또 몇 분을 기다려 이내 흡입하듯 뚝딱 해치웠다. 이제야 속이 한결 좀 낫다고 느꼈다. 밖은 아직 캄캄한데, 오가는 자동차 소리는 몹시 시끄럽다.
형식은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겨 입고 일찌감치 여관을 나섰다. 밖에는 어젯밤에 그대로 놓아둔 차가 서 있고 형식은 이내 차에 올라탔다. 묵직한 시동이 걸리면서 차는 다시 골목길을 빠져나와 곧장 큰 도로를 거쳐 다시 고속도로 IC로 진입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형식은 라디오를 듣는다. 새벽에 듣는 오래된 가요들은 형식의 입을 연신 흥얼거리게 만든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어제오늘 그리고. 하늘색 꿈. 잘못된 만남. 아침의 노래들치곤 제법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형식은 다 아는 노래들이 나온다는 게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수도권순환도로를 질주해 다시 한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먼발치로 보이는 행주산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아침 햇빛을 받아 온 물결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한강의 풍경을 차창 밖으로 잠시 또 쳐다보곤 곧장 자유로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자유로를 잠시 질주하니까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일산신도시의 모습. 호수공원을 가로지르는 장항 IC를 통해 시내로 진입했다. 호수공원의 아침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십오 년째를 살고 있는 도시임에도 이 정경은 항상 그립기만 하다.
형식은 이윽고 집에 도착했다.
날짜를 세어보니 오늘이 6월 6일, 현충일이다. 나흘짜리 징검다리 연휴의 맨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마지막 연차, 그리고 모레부턴 또다시 출근이 시작된다. 연휴를 마무리하려면 또 많은 것들을 정리해야만 한다. 옷가지며 밀려 있던 일들이며, 아직 반납하지 못한 도서관 책들까지 한꺼번에 해치우려면 하루가 촉박하기만 하다.
샤워를 하고 방 안에서 도로 인터넷을 켜서 두더지에 관한 백과사전을 찾기 시작한다. 두더지, 두더지 하면 어렸을 적부터 자주 입에 오르내릴 친숙한 이름인데도 도통 이 동물에 관한 습성이나 특성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온라인 백과사전부터 찾아 읽기 시작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두디쥐’로, 또 근대 국어에서는 ‘두더쥐’로 불리던 이 동물은 그 어원이 ‘뒤지다’의 중세 국어인 ‘뒤디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땅을 헤집고 다니면서 지렁이, 벌레 등을 잡아먹고사는 쥐를 닮은 동물. 온통 인터넷을 헤집고 다니며 온통 조악한 노래, 조악한 시편들 뿐인 세상을 바라보며 내밀지도 못한 제 시를 움켜쥔 채 하얗게 밤을 새운 덧없는 존재들. 시인이다.
형식은 두더지가 꼭 무슨 시인을 닮았다는 생각마저 문득 들었다. 에이, 아니지. 낮에도 부지런히 시를 쓰는 시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 스스로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은 후, 다시 두더지에 관한 문헌을 계속 읽어낸다. 평생 땅을 파고 살아야 하니 발톱은 무척 날카롭고 애초에 시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기에 낮에는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습성을 가졌다고 한다. 천적으로는 뱀과 매, 수리부엉이 등으로 땅속이거나 땅밖에서 잡아먹힌다고도 한다. 시인들의 천적은? 독자가 아닌 비평가들 뿐이다.
형식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북극곰이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기어들어간다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진 않을까?
북극곰 역시 놀라운 발톱을 갖고 있으니 이를 이용해 땅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면 날씨가 더운 대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두더지는 과연 무사할까?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형식은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문헌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다.
-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동물행동연구진에 따르면 유럽의 두더지는 겨울에 두개골과 뇌를 평소 크기의 11% 정도 축소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면 다시 4% 정도를 되돌립니다... (중략) 연구진은 뇌처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에너지 집약적 조직’을 축소시켜, 각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한다고 분석했습니다.
- 오스트레일리아 커틴대학교 연구진은 가시두더지가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콧물방울’을 만들어 낸다고 과학저널 ‘바이올로지 레터’에 지난 18일 발표했다... (중략) 환경생리학자 크리스틴 푸커는 “지구가 온난해짐에 따라, 가시두더지의 독특한 열 방출 방식이 얼마나 많은 열을 배출할 수 있는지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럽의 두더지들은 혹한을 극복하기 위해 두개골의 부피를 줄여 신진대사율을 낮추고 에너지를 유지하는 반면에, 호주의 가시두더지*는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섭취와 움직임을 줄이고 서늘한 동굴 안에서만 지낸다는 얘기는 두더지라는 동물이 혹한과 무더위를 모두 극복하기 위해 정반대의 신진대사를 취할 가능성도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들이다. 형식은 흥미가 더 생겼다. 두더지는 추위와 더위를 모두 극복할만한 재주를 가졌구나. (*주: 가시두더지는 단공류 생물로 알을 낳고 배꼽도 없다. 외양 탓에 이름만 빌렸을 뿐이다.)
서늘한 땅 속에서 기거하는 두더지의 삶에서 어쩌면 북극곰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유예시킬만한 방편을 찾고팠는지도 모른다. 북극곰한테도 두더지의 생활양식을 보고 배우라고 알려주는 게 어떨까? 영영 그렇게 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최소한 그 무슨 방편이라도 마련할 시간만큼은 지금 그대로 좀 버텨주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마치 어젯밤에 안부를 묻던 그 동태들처럼.
지난 주말에 한 출판사에서 주최한 신인문학상 발표 소식이 있었다.
형식은 다시금 인터넷 창에서 해당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찾아 접속한다. 우리나라에선 제법 큰 대표적인 출판사 한 곳이다. 해마다 이 출판사가 주최한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도 꽤 많아 어느덧 당대의 주류로 자리 잡은 이름들도 여럿 있었다. 당선작과 당선소감, 심사평을 가지런히 배치한 웹페이지를 찾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곱씹어 읽을수록 충분히 수긍할만한 속 깊은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형식은 이들을 다시 또 읽었다. 그리고 생각을 해본다. 이 좋은 문장들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사평의 맨 끝에 추천해 놓은 올해의 당선작은 심사평을 무색게 할 만큼 전혀 패기만만하지도 않은, 현실에 대한 일말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몇몇 기성 시인의 영향을 쉽게 떠올릴 법한 정도의 어중간한 작품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결국 달라진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북극곰 얘기처럼.
형식은 도로 웹페이지의 창을 닫았다.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
올해는 더 늦지 않게 출판을 결행할 계획이다. 형식은 다시 습작노트를 꺼냈고 올해에 써놓은 습작들의 목록을 찬찬히 살폈다. 아직 습작량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연말까지를 예상하면 충분히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만한 분량이다. 형식은 올해 드디어 첫 책을 출간하기로 한다. 독립출판.
그래봤자 이런 일들이 근본적 ‘대안’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없다면, 당장 그 어떤 해법을 내놓기도 힘들다면, 어쩌면 이런 식의 ‘유예’가 좀 더 나은 경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안타 대신에 번트다. 대신에 타구의 궤적 따위가 아닌 엉뚱하게도 타자의 속력이 훨씬 더 중요해지는 희한한 문제가 될 것 같다.
북극곰은 결국 멸종하게 될 것이다. 그 시한도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 더는 늦출 수도 없는 문제가 돼버렸다. 북극곰이 이토록 처참히 멸종을 맞는 동안 과연 인류는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수많은 이들이 이를 지적해 왔고 또 뜻있는 이들이 제법 꾸준하게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한 영장류가 한 포유류를 거세하는 이 잔인한 운명을 피할 도리는 더 이상 없게 됐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충분하게 살육적인 그 과정까지 만을 과학의 역사에 담담하게 남겨놓게 될 것 같다.
더 이상 등단이라는 제도가 작가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한다. 물론 지구상에도 몇 남지 않은 이 희한한 문화적 전통, 그동안 숱한 작가들이 혹독히 비판해 온 만큼 대다수의 기성 작가들이나 제법 영향력을 갖는 출판사들 역시 어떻게 하면 보다 더 건강한 요람이 될 수 있나를 역력히 고민해 온 시절들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틱하게 줄어든 독자들, 그 외면을 끝끝내 버텨내기엔 너무나 남루해진 옛 관행들, 몰지각하고도 몰염치하기 짝이 없을 퇴행적 행태 등도 버젓이 살아남았고 또 그런 것들이 어쩌면 무언가를 질식시켜 온 주범이자 일련의 지배구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코 짧은 시간 동안에 품은 속단이거나 회의, 조바심 끝에 고작 얻었던 열패감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유예’ 일뿐이니까. 비로소 해법을 찾아낼 만큼 또 다른 세상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는 사실도 이미 어느 정도는 터득했으니까. 그래서 끝끝내 지켜낼 무언가라도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순 있으니까. 그렇게 선택된 경우일 뿐이니까.
형식은 도로 습작노트를 켠다. 빼곡히 적힌 습작들의 목록 중에서 소설 챕터를 열었다.
그동안 써놓았던 게 어느 정도였을까를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제 다시 천천히 키보드에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놓기 시작한다. 제목을 우선 써놓는다. 북극곰을 닮은 소설가와 두더지를 닮은 시인. 둘 다를 합친 제목을 짓겠다면?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생뚱맞은 두 동물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첫 문장이 항상 중요했다. 상관관계의 수준을 상기할 단어들을 먼저 떠올리며. 시작해 보자.
텅 빈 화면.
새로운 창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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