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에 몰아닥친 '미래파' 열풍도 이미 20년이 다 돼가는 지난 과거인 지금,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시인들의 화두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극도로 부진한 시집 판매량과 해마다 들쑥날쑥한 시풍들이 번번이 새로운 '경향'을 낳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자들은 몇몇 유명한 시집들로만 눈길이 쏠리고 좀 더 다양한 시집들이 제법 활발히 읽히는 시대와는 제법 거리가 먼 요즘이지 않을까 해요.  

   이 자리에서는 그 주된 경향 중 하나가 된 '신서정'의 언저리에서 어떤 시도들이 있었고 어떠한 성취를 얻었는지, 아니면 어떤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이들을 마저 극복할만한 대안들로는 어떤 미덕들을 필요로 할까에 대한 모색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이는 주요 유력 시인들에 대한 실제비평 차원일 수도 있겠고 또 아니면 미래의 '전망'에 관한 일종의 테제 성격을 가질 수도 있는 모습이겠습니다.    

   제일 먼저는 현재 본격문학 진영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던 족적들을 되짚어보고, 그들이 갖는 의미와 한계들을 함께 톺아볼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현재 국내 문단에서는 크게 신예들의 등용문이 될 각종 문예지들의 공모와 중앙 일간지들의 신춘문예, 그리고 일부 동인지 활동 등이 있겠고 등단한 시인들의 경우는 주요 문학상 수상 등이 이에 해당될만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서 함께 살펴볼 명단을 추린다면,   

   2009년, 박형준 (소월시문학상 수상) 

   2013년, 박준 (창비 신동엽문학상 수상) 

   2014년, 박정대 (대산문학상 수상) 

   2021년, 황인찬 (현대문학상 수상) 

   2022년, 이제니 (현대문학상 수상) 

   2022년, 진은영 (창비 백석문학상 수상) 정도이며, 이들 각각은 주요 수상실적 외에도 현재까지 꾸준한 시작활동과 함께 신춘문예를 비롯한 각종 공모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문단 내 대표적 현역들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미래파' 경향 이후의 새로운 서정 즉 '신서정'을 대표할만한 작법들을 우선 이들 중에서 황인찬, 이제니, 박준 정도로 놓고 나머지 시인들은 중견에 해당될만한 연배와 시집들을 갖춘 편이니 향후 '전망'에 관한 레퍼런스 역할 정도로 함께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1. 서론 : "시는 허구"라는 말, 현대의 '서정'  

 

 

   엄마는 아직도 남의 집에 가면 몰래 그 집 냉장고 안을 훔쳐본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유 없이 화를 내던 엄마의

   일기를, 고향에 가면 아직도 훔쳐보고 있다 궁금해지면

   조금 더 사적이게 된다 애정도 없이 (중략)... 

 

   세상의 기사(記事)들은 모두 여행기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특종들,

   사건 뒤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네 가계(家系)에 속해 있다 매일 사라질 가계를 다루고 떠나는 (중략)... 

 

   짐승은 발톱을 깎아주면 신경질을 낸다 그렇게 서명은 피해가며 우리는

   침묵 속에서 자주 만난다 삶은 미묘한 차이를 견디는 일이다 수치심도 없이 (중략)... 

       

   - 김경주, '간절기' 중에서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김경주 시인의 첫 시집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쏟아졌던 "가장 주목해야 할" 또는 "한국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시집" 같은 수사가 담긴 호평들과 화려했던 데뷔 시절에도 불구하고 대필 파문 등 여러 추문들이 함께 불거진 이력 탓인지 오히려 명성이나 재능에 비해선 다소 덜 알려진 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제일 먼저 읽어보는 시는 그의 네 번째 시집인 <고래와 수증기>에서의 한 편, '간절기'입니다. 어느덧 이제 마흔일곱이 된 시인이 서른 일곱 즈음에 펴냈던 시집이기도 하죠.  

   어느 블로거의 독후감처럼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려는 '간절기'가 어쩌면 대한민국 시단의 한 '과도기'를 상징했거나, 또는 말 그대로 개인 스스로 겪었던 간절기였거나 또 아니면 변곡점에 해당될만한 어떤 한 역사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엄마'와 '가계'에 속한 나는 "사라질 가계를 다루고 떠나는" 운명, "신경질을 낸다"는 발톱과 그리움의 일부인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을 앞서서의 해석대로 벼랑 끝이게 된 시단의 풍경으로, 또는 "혼혈아에게 두근거리다"는 개인의 경험으로 내비치려 한 것인지도 열린 해석과 평가를 낳습니다. 

   "시는 허구"라는 말, 어쩌면 현대시의 정서를 (특히 '미래파' 이후의) 가장 축약해서 드러낸 담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데뷔시집의 돋보였던 수작 중 하나인 '내 워크맨 속 갠지스'에서도 그렇듯이 시인이 말하려는 '진실'은 더 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상상" 속 세계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전통적인 패턴과 서정시들이 갖는 진술의 힘과도 사뭇 그 궤를 달리 하죠. 즉, 인생의 의미나 세계의 진실 따윈 더 이상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입니다.   

   혹자들은 이를 놓고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에 따른 영향 또는 '미래파' 이후의 시단에 펼쳐진 '낯선 정서'의 영향 등을 열거하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거대담론의 붕괴 또는 이를 대체할만한 철학의 부재' 탓이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불우한 미래'를 읊조린다거나 '광장'을 애써 도피하려는 히키코모리를 닮는 경향 등은 더더욱 이를 방증하는 양태들이기도 하고요. 역시 개개인들이 갖게 되는 호불호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아무튼, 이러한 주요 경향들을 한데 아우르는 말로 요즘 대두된 새로운 용어가 곧 '신서정'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서정'을 현역 시인들은 어떤 형태로들 담아내고 있으며 또 어떤 특징들을 갖겠는가도 함께 살펴볼 차례인 것 같군요. 과거 세대와의 큰 단절을 이루었던 '미래파' 열풍 이후로도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금 내놓는 화두는 결국 '현대시의 한 이정표'를 어디에 놓을 것이냐의 문제일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또 그 지점들은 현재 가장 빛나고 있는 현역들의 입을 통해서만 발견할 대목이기도 하겠고요. 

 

 

 

   2. '신서정'의 현주소가 남긴 이미지들 : 과거와의 결별, 다양한 시도 또는 좌절의 흔적   

 

  

   과연 '신서정'이라는 타이틀을 붙일만한 단계에 이르렀을까? 

   과거의 '서정'과 지금의 '신서정'은 과연 전혀 다른 성질인 걸까? 

   이미 1990년대에도 '신서정'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면, 지금의 그것은 어떤 차별성을 갖는다는 걸까? 

   과연 '신서정'이 미래의 시단을 밝혀줄, 그 어떤 하나의 '전망'이 되어줄 수 있을까? 

 

   가장 궁금한 질문들은 대략 이렇겠습니다.     

   과거와의 확연한 결별을 통해 최근의 시단을 사실상 새로이 정립한,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해 온 시인들이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 중인 박준 시인이 있겠고 또 굉장히 독특한 화법을 구사함으로써 이 분야에서만큼은 '테크닉의 대가' 차원에 어울릴 법한 위상을 갖는 이제니 시인이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이미지 구축에 능통하면서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황인찬 시인 역시 선두그룹의 일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동안 문단이 주목해 온 이들의 시편을 통해서 '신서정'의 현주소와 그것들이 낳은 풍경에 관해 좀 언급해두려고 합니다. 

  

  

   - 첫 번째 사례, 박준 : 가장 현대적인, 가장 가까운 정서로서의 ‘서정’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 박준,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현대시들이 갖는 특징들 중 하나로 한 두 행마다 연갈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 있는데, 이는 박준의 시집뿐만이 아닌 황인찬의 그것들 속에도 자주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제니의 시집들은 반대로 한 문장을 시로 쓰는 경우도 꽤 많지만요.)  
   크게 보면, 독자들이 행간을 읽으며 스스로 이미지를 지어낼 줄 알게 된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요 반대로 무성의한 행갈이로 비추어질 수도 있어 오히려 독해에 방해가 될 경우도 적잖습니다.  
   여린 듯하면서도 매우 견고한 그의 시어들은 차분히 응축된 형상화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갈고닦은 우리의 시편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표현들을 눈부시게 구사하는 장면은 박준의 시들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합니다.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도 그렇겠지만 “가난한 밤이 숨어”들고 “시래기마냥 늘어진” 듯하면서도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은 다양한 변주 속에서 제 하나의 심상을 갖게 만듭니다. 그건 “오래 생각해 보는” 일이기도 하며,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성거리다가 가는” 일이며, 또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일들은 모두 사랑, 그리움, 흔적, 연민 같은 단어들을 저절로 떠오르게 만들죠… 직접 그것들을 단 한 차례도 꺼내지 않습니다만, 저절로 부르게 되는 이 정서를 어쩌면 ‘서정’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는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미래의 '예견'까지를 통틀어서죠.)     

   백석, 김소월과 김영랑, 그리고 허수경과 이병률? (개인적으로는 박형준) 신형철 교수가 박준의 시를 보면서 떠올린 이름들입니다. 백 년의 역사를 갖는 현대시에 대해 "서정의 근본형식이 회상"이라는 말을 끄집어낸 건 돋보이는 지적이겠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신형철 교수가 언급하지도 않았던 미당, "현존하는 미당"이란 평을 듣던 정호승, 또 "여전히 잘 팔린다"는 문태준과 나희덕, 안희연 등도 같은 맥락에 놓고 함께 읽어볼 시집들이겠습니다.  

   현대판 '연금술사'라는 칭호를 과거판 '계관시인'처럼 생각해 본 적 있었는데, 가장 섬세히 시어를 선택해 잘 배치된 문장들은 항상 아름다운 편입니다. 또 박준의 시들은 그 아름다움의 한 경지를 구현한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도 무방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을 했고, 창비의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게 이상하다고 느껴진다면 딱 그만큼이 보는 이들 스스로가 갖고 있던 지독한 편견일 따름입니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지점은 박준의 시들이 갖는 '서사로서의 시적 진술'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즉, 주요한 상징 중 하나인 '미인'과의 다양한 스토리들이 마치 어렴풋한 우화 한 편처럼 펼치지는 장면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데, 과거의 회상과도 같은 이 스토리텔링 방식이 단아함과 생략, 절제와 함께 아름다운 문장으로 수놓아질 때면 왜 당대의 '계관시인' 같은 호칭을 감히 붙이겠느냐는 질문도 무색할 법합니다. 결국 이는 좋은 문장들이 갖는 힘 그 자체입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 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 박준, '환절기'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함께 시장을 거닐고 함께 물복숭아를 먹던 추억들이 몇 번의 계절들을 함께 했었는가는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인생이라는 큰 계절들 중 불과 며칠뿐인 그 계절들을 추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일 것 같다는 생각은 좀 들었습니다.     

     

   ※ 근본적 정서로서의 '수줍음'에 대한 짤막한 생각 : 
   때때금 ‘수줍다’는 말을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무언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그 반대편의 풋풋한 희망 따위, 그래도 여전히 제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함과 스스로를 믿는 넉넉하기만 한 담담함 등이 한데 엉킨 듯한 표정과 옷매무새와 몸짓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기로 합니다. 모든 문청들이 신춘문예의 문턱에서 마지막으로 퇴고를 한 습작들을 봉투에 넣고 주소를 네임펜으로 꾹꾹 눌러 적으며 우체국 안에서 서성거릴 때의 풍경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 ‘수줍음’은 한탄과 울음 섞인 절망의 처음이요, 여전한 아름다움의 일부로도 존재하는 법이란 걸 배웠던 시절이 있습니다.  

   박준의 시편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정서가 무엇일까도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수줍음'의 정서는 아니었을까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마음, 고개'입니다. ; 

  
   서늘한 바람이
   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 나갔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

   그제야 당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아도
   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 박준, '마음, 고개' 중에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 두 번째 사례, 이제니 :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두 번째로 살펴볼 현역은 이제니 시인입니다. 뚜렷한 작법을 이미 드러냈고, 그 한 개성이 현대시를 대표할만한 인상적인 문체로 자리 잡은 인물이기도 하죠. 신춘문예를 무려 십몇수만에 통과해 어느덧 데뷔 15년 차가 된 중견급이지만 연배를 놓고 본다면 벌써 오십 대 중반을 향하는 굵직한 베테랑이기도 합니다.   

   이제니 시인의 시들이 갖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로 마침표의 역할이 있을 텐데, 이들은 마치 행과 연갈이를 대체하려는 듯한 모양새로 그 역할을 취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마치 예전 신문들에서 비좁은 지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쓰던 방식과도 유사해 보입니다.) 지난 2022년 제6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인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중 일부입니다. ;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중략)...

   돌연 가슴을 두드리는 슬픔이 지나가고...... 돌은 다시 발견된다. 돌은 그제야 제자리에 놓인다. 발견되는 돌 이전에는 발생한 눈이 있었고, 눈. 바라보는 눈. 바라보면서 알아차리는 눈. 알아차리면서 흘러가는 눈. 흘러가면서 머무르는 눈. 머무르면서 지워지는 눈. 지워지면서 다시 되새기는 눈. 너는 엽서의 뒷장을 펼쳐 읽는다. 끝없는 설원의 가장자리로부터 한 사람이 베일 듯 걸어 나온다. (중략)...

   네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찰나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로서, 너는 작고 검은 돌 위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한 얼굴을 발견한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무수히 떠오르는 몸짓들. 빛과 어둠의 경계 위에서 흩날리는 입자와 입자 사이의 흐느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기억처럼 먼지의 춤이 발생한다. 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하염없이 내리는 누이 있었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이전에는 하염없이 덮이는 땅이 있었고, 하염없이 덮이는 땅 이전에는 하염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몸이 있었고...... (중략)...

   누군가 멀리서 내내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들려오듯 문득 서럽고 드넓게 울려오는 네 마음속 한목소리가 있어. 너는 먼 곳의 얼굴 없는 사제를 네 영혼의 친척으로 여기는 것이다.
     

   -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중에서 (<현대문학> 8월호, 2021) 

     
   춤을 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노와 슬픔을 한데 모아 발끝과 손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리듬을 타고 가느라한 색실 같은 게 흘러나오면 그 실오라기를 부여쥔 채 하염없이 떠도는 공간, 그 속에서 찰나의 시간을 새겨 넣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춤을 노래한다는 건 또 무얼까요.

   분노와 슬픔이 형형색색으로 수놓기 시작하는 그 시간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흘러서 더는 보지 못할 일들에 관한 추억을 미리 저장해 놓는 일 따위.

   미리 써놓는다는 일은 때때로 시답지 못한 일이기 십상인 노릇입니다. 
   춤을 처음 발견할 무렵, 시인은 어쩌면 ‘분노와 슬픔’보다도 ‘구도와 헌신’을 더 먼저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유폐한 기도, 설원 위를 걷는 짐승의 그것처럼 울음을 듣는 사람이 되어 어린 짐승을 돌보고 편지를 쓰는 일로 스스로를 규정하곤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가끔씩 끓어오르는 분노를, 심연을 알 수 없을 슬픔을 빚어 꺼내는 눈물과도 같을 일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그것들을 부여잡고 또 다독이면서 거리를 둔 채 그저 밋밋하게 담담하게 말할 줄 아는 게 또 시인의 태도라고도 여겼던 시절이 있습니다.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시인이 춤에서 처음 발견해내고자 한 그 무언가가 사제를 친척처럼 여기는 영혼으로, 멀리서 누군가를 돕는 존재로도 각인되려면 또 어떤 수행을 묵묵히 더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이 시를 읽는 마음가짐이 이렇습니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중략)...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중략)...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 이제니, '페루' 중에서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현 주류 (소위 ‘메이저’ 시집들을 출간하고 있으며, 각종 공모전 심사 및 주요 대학 강단에 서있는 이들) 중에서 어쩌면 유일한 신춘문예 출신도 이제니 시인일 것 같군요… 박준, 황인찬, 안희연, 오은 등등이 모두 신춘문예를 거치지 않고 각기 다른 문예지들을 통해 등단했기 때문인데, 확연히 달라진 시단의 풍경을 대변하기도 하는 대목예요.       

   

   

   - 세 번째 사례, 황인찬 : 시답지 않은 시로 등극한 '아이돌'의 현주소 

        

   현 시단의 대표주자 격인 황인찬의 신작 시집인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출간된 올해입니다.

   특히 학부 중심의 문창과 계열 등에서 가장 큰 환대를 받곤 해온 이 시인을 이렇듯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까닭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 된 시인이지 않은가 하는 적지 않은 우려, 정작 시인의 작품세계보다도 생뚱맞게는 그의 외양과 명성 쪽에 더 매몰된 듯한 희한한 분위기의 팬덤 현상, 시를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뭔 소린지는 몰라도 내 취향과 입맛에 맞기 때문에 그냥 "좋다"고만 말하는 무수한 인상비평류의 독후감들까지... 한동안 그에 대한 평가를 보류해 놓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 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중에서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

 

   뜻하지 않게 사람들은 "내 앞에 모여 있었"고 "묻고 있었"고 "자꾸 말을 하라고" 합니다만, 시인은 그럴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는 솔직한 심경이었을 테며 급기야 "토끼풀 같은 삶"으로 스스로를 치부하기도 합니다.

여타의 작품들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시인의 스탠스는 어쩌면 일종의 '당위' 같은 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지 않을까로 해석하곤 해왔습니다. 이번 시에서도 웬 '절벽'이 등장했으며 누군가는 또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고만 말합니다. (심지어 누군가한테는 떠밀리기도 했고) 이 모든 정황들에서 시인은 전혀 의도한 바도 없이, 어처구니없게도 그저 '돌연 당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시인이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이라며 독백하는 부분은 설령 그것이 시인의 행동을 자극했거나 또는 시인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손쳐도 결코 그 "마음"을 둔 게 아니라는 뜻임을 밝힙니다. 아예 대놓고는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있는 상태를 "내 마음이라고 하자"는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 대목에서 모든 '의미'는 돌연 '무의미'로 전락하게 되겠죠. (시인이 원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 지점을 그리 해석합니다.)     

   사실 이런 투의 독백은 황인찬의 기존 시들에서도 충분히 나타난 면이겠죠. 의미를 거부하는 몸짓, 좀 더 정확히는 그 어떤 '의미'를 지향하는 일이 덧없거나 불가능할 것이란 믿음이 훨씬 더 큰 탓으로 읽힙니다. 그저 사사로운, 가벼운 말장난을 섞는, 돌연 얼버무리곤 하는 말투들의 원천 역시 그런 마음과 태도들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고요.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그의 데뷔시집 중 뛰어난 소품이었던 (사실상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 된 큰 이유 중 하나였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처럼 끝끝내 둔탁하고 묵직하면서도 그저 담담했던, 반대로 그 내면은 온통 '치열함'일 뿐인 시인만의 어조가 가장 돋보일만한 지점들은 따로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면 무덤덤해진 그리움, 속절없는 안타까움, 딱히 정해지지 않은 방향에 관한 물음 내지 방황 따위가 어쩌면 이런 부분들에 해당될 터인데... 실제로 대부분의 시들이 그런 뉘앙스로들 읽히면서도 마치 이것들만이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어떤 '정서'의 차원쯤으로 해독되어 전파되곤 하는 '오버스러움'에 대해선 여전히 무척 달갑지 않은 현상이라는 입장인 탓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인 스스로가, 훨씬 더 점층적인 해법에 의한 처연함이거나 슬픔과도 같을 독백의 처방일지라도, 괜스레 '겉멋' 따위가 아닌 진솔함으로 와닿는 새로운 화법을 발견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은, 그저 "덧없다"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할 기이한 '히키코모리'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낯설고 두려운 또 다른 '장소'를, 또 다른 '진지'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여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정을 무르고 나면 제가 열지 않은 문이 멋대로 열립니다 가까운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 몰려들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언성을 높이고, 누군가는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 혼돈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뿐이군요 
   거짓말이지만  
    
   - 황인찬, '기울이기' 중에서 (<문학사상> 6월호, 2023) 

      

  

   - 소결 : 그동안의 좌절은 '단절' 때문이 아닌 '연계'의 부재 탓 

       

   이상에서 살펴본 주요 현역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기할만한 사항들을 추리게 됩니다. 

   박준의 시가 보여준 '서사로서의 시적 진술'과 '수줍음' 같은 정서의 포착, 그리고 이제니 시인에게서 두드러진 전통의 파괴, 언어적 유희, 끈질긴 시어에의 탐구 등도 짚어볼 대목이겠고, 또 황인찬 시인의 최대 무기 중 하나일 중층적 이미지의 입체화 노력, 밋밋한 진술과 큰 여백으로 인한 '거리'의 유지, 또 직유나 은유보다는 환유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모습 등은 전통적인 '서정'과 이들의 '신서정'이 갖는 간극이 어느 정도인가를 작품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입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각종 공모전 입상자들의 면면에선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만, 시적 경향에선 눈에 띌 법한 특징들을 몇몇 갖는다고도 볼 수가 있겠죠. 예를 들면, 

   - 산문시들이 워낙 강세인지 운율은 이제 거의 실종 

   - 알레고리 등을 도입한 환상문학류의 광범위한 대두 

   - 창작전문학원 중심의, 세부적인 면에서의 보편화 (특히 기성시인 위주로 형성된 유료과정) 

   - '시대'보다는 '일상'에 더더욱 천착한 '은둔형' 고백 등등이 아닐까 합니다. 

   음... 이들을 문학사적으로는 또 어떻게 정리해 담을 것인가도 현 문단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가 되리라 봅니다.

   (어쩌면 "별다른 성취가 없었다"라고 쓸 수도요.)        

   물론 '미래파' 이후의 시단은 과거 세대와의 단절을 통해 참신한 이미지들, 낯선 정서들과 새로운 언어적 실험 등을 선보였으며 그만한 시적 성취들 또한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일부 독자층과의 괴리, 평단 위주로 전개된 스타일에 관한 편견 등이 어쩌면 더 크게 발목을 잡았지 않았나 하는 인상도 좀 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 주목해 둘 부분은 과연 그 '단절'이 결코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여전히 대중이 선호하는 시들의 상당수는 과거의 전통적 '서정'에 기반한 측면도 있겠고, 또 그만큼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문학작품이라 해도 독자들이 외면하는 이상 그 입지를 위협당하기 일쑤여서, 과연 지금의 이 경향을 놓고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기가 퍽 쉽지 않음도 엄연한 현실일 것 같습니다.  

   이미 대한민국 시단이 형성된 지도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을 지탱해 온, 버텨온 신념들이 각각 무너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고 또 어쩌면 '미래파' 이후의 단절 역시 그것을 막아내기는커녕 더욱 부채질만 한 모양새여선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 역시 큰 편입니다. 오히려 '단절'보다는 '연계'를 더 많이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3. '신서정'의 미래를 위한 몇 힌트들 : 총체적 형상화, 감각과 사물, 그리고 혁명적 '낭만' 

 

     

   이른바 '신서정' 즉, 기존의 '미래파' 시대를 능가할만한 (다시 말해 극복 가능한) 대안적 시도들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할 테지만, 정작 독자들이나 평단의 주목은 오히려 전통적인 '서정' 내지는 종전의 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고민스러울 대목입니다. (현재 시집 시장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태주, 박준 류의 시집들이 갖는 공통적 특성 또한 그렇고 대학 강단에서 주되게 펼쳐진 담론들 역시 기존 '미래파'의 문제의식보다 더 이상 큰 진전은 없다고 보는 편이 냉혹하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이 아닐까 해서요.)   

   그렇다면, 문단이 야심 차게 시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로 외친 그 '신서정'은 과연 어떠한 양상으로 향후 시단을 이끌게 될 것인가의 논제는 아직 꽤 유효하다고 보는 편이죠. 또 그걸 어떻게 제시하느냐 못지않게 그만한 작품들의 성취 역시도 꾸준히 주목해 볼 만한 지점이겠습니다.  

   해법은 여전히 '온고지신' 쪽에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재까지 그래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레퍼런스'를 통해서도 그나마 가늠해 볼 만한 구석들이 여럿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이제 현 '주류'라기보다는 과거의 '중견'급에 더 해당될 시인 세 명을 더 제시함으로써 이들이 갖는 포인트들을 함께 살펴볼 차례입니다.  

   1990년대의 '신서정'으로 일컬었던, 가장 대표적인 '형상화'의 달인으로 박형준 시인을 살펴봅니다. 또 한 명의 중견 시인은 병마를 딛고 오랜만에 신작 시집을 펴냄과 동시에 2022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진은영 시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다소 '올드하다'는 평도 듣지만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갖는 박정대 시인까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첫 번째 포인트, 박형준 : '90년대식 '신서정'이 아직껏 살아남는 이유 

  

   1990년대 신춘문예 당선자 출신들 중 이후의 작품성과 활동성 등을 따져 문단 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은 시인은 다름 아닌 박형준 시인이었습니다. 대표작에 해당될만한 첫 시집인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와 얼마 전에 창비에서 나온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에 실렸던 몇몇 수작들을 또 꺼낼 법도 한데, 어느덧 올해 신춘문예를 앞둔 시점인 까닭에 이번 글에서는 그의 데뷔작이요 등단작인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 편을 먼저 꺼내봅니다. ;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2연)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4연) 
 
   - 박형준, '가구의 힘' 중에서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예전부터도 그를 '형상화의 달인'이라로 소개했던 적 있는데, 당시에 시인이 했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소외와 결핍을 통해 시를 쓰고, 슬픔을 의지로 전환해서, 또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벌판을 만들겠다"던 담화는 아직도 유효한 지침 중 하나일 것으로도 생각하는 편입니다.   

   '뛰어난 문장'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대뜸 떠올릴 법한 시인 중 한 명인데, 그가 쓴 작품들 중 가장 빼어난 수작 중 한 편인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에서 문체의 매력은 크게 빛을 발합니다. 짧게만 인용합니다. ;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중에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김승옥의 감각적인 문체는 한 편의 시를 가볍게 능가해 온 이력을 갖기도 하죠. 박경리의 서사와 최인훈의 사유 역시 비슷한 힘을 가졌습니다. 필사에도 아주 큰 도움과 깨달음을 주던 경험들이요 훌륭한 스승들입니다. 

   어쩌면 박형준이야말로 '소멸'을 통해서 '소외'를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려니 그게 곧 "형상화의 달인" 정도가 아니겠는가 하고요. 다음 작품은 최근의 시집에 실렸던 한 편입니다. ;   

 
   자신만의 세계에 속한다는 표시로
   이마에 섬을 만드는 노인들의 조용한 노동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 그들은
   물레로 강물 소리를 감아올리며
   생각의 실을 잣는다
   강변에 쌓인 모래톱이 밀려온 물살에 쓸리며
   새들의 발자국을 지우는 황혼 무렵
   막 고치 속에서 기어나온 듯
   환한 주름 하나 그림자 하나

   - 박형준,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 중에서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 2020)

     
   실로 빼어난 경지를 자아낸 이 시는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평범한 노년의 삶이 겪어야 하는 굴곡들처럼 험상궂고도 척박한 운명인 게 또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 따윈 안중에도 없이 실제로 주변에서 겪는 피폐한 일상들이 더 먼저 떠오를 법한 작품입니다. "산책로에 놓인 벤치마다 앉아 있는" 운명들은 그 가혹함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처연함을 갖습니다.
   워낙 형용의 측면에서는 발군의 기량을 보여온 시인인 만큼 "시간을 짰다 풀었다" 하며 "이마에 섬을 만드는" 노인들의 조용한 노동을 앞세우는 바람에 저절로 "강물 소리를 감아올리"는 물레로 짠 "생각의 실"을 함께 한 올씩 벗겨내 보는 순간들을 함께 경험합니다. "새들의 발자국을 지우는 황혼 무렵"에 이르는 노인들의 삶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을까 하는 감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비로소 박형준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던 그 제법 오래된 무게감 역시 함께 실감하게 마련인 법일까요.  
 

 

   - 두 번째 포인트, 진은영 : 감각적 사물들이 서정을 빛내는 순간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 진은영, '청혼' 중에서 (계간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가장 아름다운 시”라는 찬사를 들으며 지난해에 열렸던 창비의 제24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권두시로 실린 '청혼'이라는 작품입니다. (원래는 지난 2014년에 <창작과비평>을 통해 발표된 시였다가, 10년 만에 새롭게 발간된 작년의 새 시집에 함께 실리기도 했죠.) 

   한 평론가가 그의 시풍을 요약해 놓은 구절 또한 꽤 인상적입니다. ; 

 

   “진은영이 추구하는 시는 무의식적 차원의 ‘감각의 재분배’(자크 랑시에르)를 통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운동이다. ‘사랑’과 ‘혁명’의 동의어인 이 운동은 세계가 그대로여도 주체가 위치와 행위를 바꿈으로써 진전된다. 진은영의 말처럼, 같은 장소도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 김수이, '새로운 입구, 전형적인 삶으로부터의 자유' 중에서 (한겨레, 2016)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기성 시인은 바로 송기원이었습니다. 역대 신춘문예 최고 수작 중 한 편으로도 꼽는 그의 데뷔작 ‘회복기의 노래’에 관한 심사평은 두고두고 회자된 칭찬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훌륭한 시를 내준 송기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이 등장했습니다.)  

   마치 "연초록으로 물들고" "야광충이 되어" 떠돌던 그것처럼 "오래된 거리"와 "순결한 비누거품" 또 "투명 유리조각"은 눈과 귀를 유혹하는 즐거움입니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을 서사, 또 노래 한 곡조를 대신할만한 리듬과 운율, 그리고 또 한 편의 그림이 빚을 법한 풍경과 순간 등을 고루 담는 미덕이 시의 한 정점임을 깨닫게 하는 지점입니다.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 너머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 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 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 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중에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022) 

 

   역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실린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인데요... 실은 그만한 시사점들을 많이 제공해 주는 측면도 있어서예요. 첫 번째 화두로 꼽아보는 부분은 그만의 독특한 감각적 사유와 사물들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들을 한데 모아서 우화적 문장으로 이끌어낸 힘 등에 주목해 보려는 까닭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달팽이'를 꺼냈습니다. '당신'의 옛 추억들을 유추해 볼 만한 풍경들을 그려냈고, 그 작은 사연들에도 각각 이름을 붙여놓습니다. (이들은 제각각 '창백'하거나, '웅성거림'을 따라나선 '붉은 잔' 속의 '마른 가지'일 때도 있고, 혹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일 수도 있겠어요. 때때금 '문방구 앞'과 '은유의 커다란 옷장'이기도 할 테고요. '차력사인 봄'과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내리는 눈은 제각각의 풍경들로 배치됩니다.)

   '파란 대문'과 '골목길' 또 '담벼락들' 앞에서의 '울음'들은 이제 '마을 전체'를 호명할 만큼 거대한 대상으로 치환됩니다. 그 거대한 '당신'의 등 위로 풀어놓는 '사랑의 민달팽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사랑의 고백 한 편일 것 같습니다. 

  

   진은영의 시편들은 몹시 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무릇 사조란 무엇일까 같은 형이상학적 고민 외에도 다양한 작법과 시어들을 통해 충분히 그 어떤 의미 있는 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묵시적 깨달음? 그리고, 그 깨달음이 갖는 시와 대중이 원하곤 한 시들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감각적인 어법과 다양한 매개물들을 통한 비유들로써 도달한 어느 한 높은 경지일 것 같습니다. 

       

  

   - 세 번째 포인트, 박정대 : 가장 '전위적'인 섬, 격렬비열도에서 외친 혁명적 유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며칠 동안 술만 마셨소 
   나의 고독은 나의 침묵은 나의 음주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소 
   그래서 고독했고 그래서 침묵했고 그래서 음주만 했던 것이오 
   나에겐 불의에 대항할 총이 없었고 허무에 맞설 사랑이 없었고 열대야를 재빠르게 건너갈 서늘한 신념조차 없었던 게요 
 
   귀하를 러브하오 그런데 러브는 과연 무엇이오 
   도대체 이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오 
   귀하는 또 어디에서 이 뜨거운 밤을 혼자 건너가고 있는 것이오 
 
   밤하늘에 보이는 건 그저 깊고 깊은 그룸뿐이오 
   태양탐사선 유진파커호를 보냈다 하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서로 연대하려는 지상의 밤이오 
   연락하오 귀하는 누구요 안녕 
   깊은 밤하늘에 그가 있소 
      
   - 박정대, '시' 중에서 (<불란서 고아의 지도>, 현대문학, 2019)
    

   대한민국 최서단, 격렬비열도라는 낯선 이름만큼이나 더 유명해진 박정대 시인은 현존하는 가장 '전위적'인 시인 중 한 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벌써 그의 나이도 이젠 벌써 쉰여덟이나 되었다는 게 어쩌면 유일한 핸디캡이라고 할만한) 

   사실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픈 시는 '의기양양 (계속 걷기 위한 삼중주)'이었습니다. 지독한 난해함은 둘째치고 무려 시집으로만 오십 페이지에 가까운 이 엄청난 분량의 시 안에서 시인은 짐짓 "전직 천사"를 참칭하며 '혁명적 유머'와 그만의 시론을 유장하게 펼쳐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장함'이란 결코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급진적인 무언가에 더 가까울 것이기에 이를 '전위적'이라 표현하는 게 더욱 적절할 것 같습니다. 

  

   "단언컨대 모든 것은 시로부터 온다" (시 '의기양양' 중에서) 

 

   한창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방영될 무렵, 시인은 너스레를 떨며 유친 초이의 말투를 흉내 냅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의기양양>에서 한창 시론을 펼쳤음에도 무언가 또 다른 할 말이 더 남았다는 것인지 시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시>입니다. (실은 같은 제목을 갖는 또 다른 작품을 2021년에 펴낸 최근의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에도 수록한 바 있기도 하죠.)  

   스스로 "칼 마르크스"를 언급하면서도 대뜸 "키치"를 수용할 만큼 그가 갖는 '포스트모던'함에 대한 자격지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의기양양>에서처럼 태연스럽게 사무엘 베케트, 라이프니츠주의자, 가스통 바슐라르, 알베르 카뮈 같은 이름들을 주절댑니다. 그렇다고 또 그들을 추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 천연덕스럽게 수백 명의 이름들을 열거한 태도는 어쩌면 그가 그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자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이름을 붙인 "코케인"과 "아무르"는 여전히 중요한 상징들입니다. "코케인"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즐거움과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에의 절망 사이에서 시인의 "고독"은 "투박하고 좋았던 것"을 닮고 싶은 모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슬픔, 죽음, 그리고 고독과 침묵과 음주로 이어지는 일종의 알리바이입니다. "총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서늘한 신념조차 없었던" 시인이 이 지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방식을 (또는 그 속에서의 "아무르"를) 스스로 구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음악들' 전문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 2001)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공산품처럼 획일화된 전국단위 공모전들의 '패턴'을 슬쩍 비켜서 한층 더 '개성'을 드러낼만한 신작들도 좀 더 자주 나왔으면 제법 풍성해지진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이 정도의 고민은 이제 신춘문예가 아닌 역대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 훨씬 더 뚜렷해집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호령해 온 듯한 박준이나 황인찬도 이제니도 안희연도 아직 수상을 못한 국내 최대 상금규모라는 대산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목록에는 바로 박정대 시인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4. '신서정'의 미래 : "시는 곧 진실"이라는 말, 미래의 '서정' 

 

 

   '신서정'의 담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는 결국 모든 작가와 독자들의 몫이겠습니다. 다만 그동안의 용례와 용법들을 놓고 한 번 정도는 다시금 재고할 측면들을 살펴보고, 또 가능하다면 그 외연을 더 확장하여 일련의 사조처럼 당대의 '패러다임'으로 상정하려는 노력은 꽤 의미 있는 작업일 것으로도 믿는 편입니다. 

   과거와의 '결별'보다는 과거와의 '연계'를 통하여,

   '은둔'해온 고백들을 꺼내 '혁명적' 낭만으로 치환하는 한편,

   또 '무기력'한 얼버무림을 극복하고자 '감각적' 문체를 총동원하는 노력 등은 지금처럼 고립상태에 빠진 대한민국 시단을 아예 뛰어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로 가히 총천연색으로 독자들을 향해 구애를 펼칠 '수줍은' 무지개도 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작업에, 그 과정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거대한 뿌리'와도 같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늘 바랍니다. 

   "시는 곧 진실"이라는 말을 믿기로 합니다.

   제 아무리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힘든 세상이라 해도 결국 또 언젠가는 겪어야만 할 세상의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지쳐 스산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단 한 문장을 위해 평생을 다하는 직업이 곧 시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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