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1 8인치의 강*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다오.
당신이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니면 어떤 이들이 당신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이 한 것이 틀렸다고 말했다. <잘못해서 미안합니다> 하고서, 당신은 다시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아이였을 때 했던 놀이이거나, 아니면 당신이 늙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마음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강물 속을 응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신 가까이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악 당신을 만지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하기 전에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아주 멀리서 어떤 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에 가까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당신은 침대에 누워 거의 잠들려 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끝내기에 아주 좋은, 뭔가, 혼자 하는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있었고, 자기가 뭘 먹고 있는지를 잠시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계속 먹으면서, 그게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그건 자정 무렵이었고, 그리고 스토브 안에서 불길이 弔鐘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그녀가 당신에게 그 일을 얘기했을 때 좋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걸 다른 어떤 사람에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문제들을 잘 아는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송어들은 깊고 잔잔한 곳에서 헤엄쳤지만, 그러나 그 강은 겨우 8인치 너비였고, 달이 아이디아뜨를 비치고 있었고, 그래서 워터멜론 들판은 걸맞지 않게 어둡게 빛을 발했고, 그래서 모든 초목들로부터 달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2 사천의 천사
당신은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천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길 위에서 길 위로 하염없이 떠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정말 (길 위에) 있었고, 당신은 아마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 천사에게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3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生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4 만항재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가 나타나지 않아 뒤돌아보면 좁은 산길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나무들의 물결. 허공의 바다를 털털거리며 지난다.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이곳은 전생에 무슨 바다였나. 길이 좁아질수록 생각들은 날아가고, 길이 험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리움의 계곡. 엄나무들은 엄숙하게 머리를 길렀지만 식솔들 이끌고 산 중턱까지 와서 정착한 낙엽송, 참나무 이주민들. 아무리 달려도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아 어느새 다다른 하늘 밑, 침묵은 끝나지 않고 바람 끝에 매달려 오서 끝내 만항재, 해발 1,330미터라고 씌어진 곳에서 불어가는 음악, 페루, 나비, 바람.
그것이 내 이름이다.
5 음악, 페루, 나비의 경계를 지나서
오래도록 꿈꾸던 것, 그것을 나는 만항재에서 본다. 만항재는 음악과 페루와 나비의 경계선. 이 경계선을 지나면 음악만이 남을 것. 그때부터 나는 눈을 버리고 음악을 얻을 것. 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 참 많이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음악 소리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내 이름이다.
6 만항 이야기
만항이라는 곳. 이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집들이, 주인 잃은 배들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곳. 석양이, 열두 개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곳. 허공에 매달린 항구, 만항을 지난다. 집들이 산비탈에 걸려, 컹컹거리며 짖고 있다. 내 어릴 적 검은 판자의 하늘이, 허공에 걸려 나부낀다. 이거도 강원도식, 風磬이라면 풍경인 곳. 만항이라는 곳.
그것이 내 이름이다.
7 밤의 비탈길에서
만항 마을 지나, 저 속세로, 자장 율사가 창건한 정암사 찾아가는 길. 낮에, 자장면 한 그릇 먹고 그대 진신사리 찾아가는 길. 하산할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꿈. 양파처럼 별들 흩뿔지는 밤의 비탈길에서, 텅 빈 그릇처럼 캄캄해져 오는 밤에서, 강원도라는 섬에서 잠들지 못한 산짐승들은 달빛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8 다시 만항 이야기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나는 중얼거린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두워질수록 나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대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수 있다. 내가 아픈 건 네가 아프기 때문이다. 갑자기 숲의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바람이 아프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바람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나무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누군가 끊임없이 술잔을 비운다. 술잔 밖 세상이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만하다. 그러나 네가 아픈 건 내가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9 또다시 만항 이야기
체, 체, 체, 게바라의 바람이 분다. 쿠바의 풀잎들은 여기에 없다.
만항의 오래된 바람이 분다. 내가 하염없이 신생을 꿈꾸며 떠난 여행길에서도 오래된 기억의 바람은 허공의 갈피갈피에서 나를 덮친다. 내가 만항을 지났던가. 나는 깊은 산속 어지러운 굴헝을 헤맨다. 쿠바의 풀잎들은 여기에 없다. 체, 체, 체, 거봐라, 혀를 차며 만항의 오래된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0 밤의 여행자들
당신은 사는 게 힘겨워져 밤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 밤을 따라서 한없이 달려가다 보면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동안에도 천사들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당신은 수없이 촛불을 꺼트려야 했다. 촛불이 꺼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길을 내고, 새롭게 이 세계의 지도를 그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당신이 숨쉬는 매 순간의 공기들이 너무 답답해 어디론가 떠나려고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허공에다 당신은 매일 간절한 키스를 한다. 그 입맞춤이 대지의 가슴에 닿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그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느 날 당신은 창밖에 환하게 핀 앵두꽃을 보고 밤이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당신은 그 꽃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때로는 음악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1 천사들
숲에 가면 나뭇잎마다 천사들이 산다. 그 천사들은 당신의 한숨 속에서 태어났다. 당신이 매 순간 허공으로 천사들을 날려보낼 때마다, 당신은 또 하나의 촛불을 꺼트리고 있는 셈이다. 숲에 가면 나뭇잎마다 유배당한 천사들이 산다. 천사들은 나와 입맞추고 싶어한다. 나도 그렇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것이 내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불꽃으로 나는 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산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불꽃의 線, 끝없이 움직이는, 일렁이는
발광하는 生
그것이 내 이름이다.
12 달과 하나의 촛불 이야기
나는 열두 개의 촛불을 다 꺼트리며 벽파령에 올랐다. 벽파령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열두 개의 촛불이 다 꺼진 다음에야 가까스로 타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촛불을 보았다. 그것은 달이었다. 달은 서서히 숲들을 지나 나에게로 왔다. 나는 달에게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달은 다만 내가 잃어버린 열두 개의 촛불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이름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 「1 8인치의 강」의 내용은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줄곧 어떤, 경계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람과 바람의 경계, 나무와 땅의 경계, 그리고 열두 개의 촛불과 그대 한숨의 경계, 그러다가 나는 어떤 나뭇잎 천사의 도움으로 <벽파령>이라는 데 이르렀다. 평창에서 정선의 가리왕산 휴양림으로 넘어가는 비포장 산길의 정상. 나는 열두 개의 촛불을 다 꺼트리며 벽파령에 올랐을 뿐이다. 그 산정에서 내가 만난 것은 단 하나의 촛불인 <달>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에 대한 서투른 드로잉일 뿐이다. <벽파령 이미지>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잡다한 <만항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 박정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 2001)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둥글게 둥글게 (이영주) (0) | 2024.05.03 |
---|---|
나의 아름답고 믿을 수 없는 우연 (양안다) (2) | 2024.05.01 |
산정묘지 1 (조정권) (1) | 2024.05.01 |
검고 맑은 잠 (황유원) (1) | 2024.05.01 |
나는야 세컨드 1 (김경미) (0) | 2024.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