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맑은 잠
창문을 열어놓은 채 홀로 물이나 한잔
따라 마시고 있을 때
그는 꼭 화선지에 칠해진 검은 밤 같다
벼루에 찬물 따르고 먹을 갈면
거기서 풀려나온 새까만 밤이
물속에 고이고
이 밤이 벼루에서 나온 것인지 먹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벼루에 먹을 갈던 손의 움직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물속에 고인 밤은 확실히
깊고
고요하여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차고 맑은 바람 스민 글자들 정서해
종이의 온몸에 한기가 들게 만든다
이 차고 맑은 밤이 좋이 위로 옮겨가는 만큼
자신의 잠도 차고 맑아질 줄로 믿으며
그는 자신의 밤이 몇 개의 검고 맑은 글자로 고여
계절 속에 서서히
말라가는 걸 본다
문득 잠에서 깨 바라보면
모든 게 예외 없이 말라가고 있고
불을 꺼놓고 잠들었는데도
밤은 또 이토록 생생하고
* 황유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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