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답고 믿을 수 없는 우연
1
반평생 두 눈을 가린 채 생활하다 끝내 안대를 벗은 사람이 있을까 빛을 처음 목격한 듯이 나는 카메라를 쥐고 세상을 담으려 애썼다 새벽이면 쉴 새 없이 스크린 위로 세상이 상영되었지만 그곳엔 내가 없었다 그런 건 다 무용한 짓이라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엘리는 종종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암묵적인 금기였고 그럴 때마다 윤은 엘리를 꾸짖었다 몬데는 그저 휘파람을 불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선율이 무슨 곡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원은 식물 가꾸는 일을 한다고 했다 빛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들을 가꾸다 보면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 빛이 사라지고 밤이 오면 식물들이 무슨 꿈을 꾸는지도 알 수 있는 걸까
우리들은 가끔 한자리에 모여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일에 관해 떠들었지만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알려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경 다발이 끊길 정도로 취할 때면 도와 줘, 나는 무표정으로 말했지만 누구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도와 줘 나 좀 도와 달라고...... 목각 인형이 입을 열고 닫듯 반복해도 나의 귀에 되돌아오는 건 잔 부딪히는 소리 유리 깨지는 소리
때때로 영은 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거리를 뛰어다녔고 달리는 건 영의 장기였으나 나는 그녀의 폐가 터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날 밤, 영은 자신의 발목을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LOVE LOVE LOVE, 양말에 적힌 문구
2
엘리는 말했다 너희들 표정은 정말 사랑스럽구나 당장 너희를 죽일 정도로 아름답구나...... 취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우리는 엘리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부축했으며 아무도 없는 거리와 우리의 내부를 노래로 가득 채웠다
윤은 몬데와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간혹 몬데는 방금 죽은 사람인 것처럼 말이 없어질 때가 있었는데 윤은 그 침묵을 사랑했던 것 같다 폭우 속을 한참 걷기 위해서 하나의 우산만 챙기는 거라고, 쏟아지는 비에 어깨를 적시며 윤은 말했다 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흔들거렸고
때때로 원은 내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바람이 불지 않는 지점에서 꽃잎을 떨어뜨리는 힘은 무엇일까'라거나 '가만히 있는 것이 식물의 자세라면 식물이 되어도 좋았을 텐데'와 같은
점멸하는 스크린을 보며 내가 자주 떠올린 건 엘리의 얼굴이었다 발작할 때의 표정과 죽은 친구를 생각하는 표정, 슬픔을 견디려는 표정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변주되었다 그 장면의 끝에서 엘리는 기타를 품 안에 끌어안고 연주할 때의 표정이 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네가 망가지려는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어."
친구, 나도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 스스로 슬픔을 싼값에 흥정하며
더는 미소를 팔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나는 알고 있지
네가 망가지는 동안 세상이 멈추지 않고
우리가 계속 웃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어
네가 나의 마음을 이해하듯이
내가 너의 슬픔을 이해하듯이
3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깃발과 구호는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개미 떼가 일렬로 먹이를 운반한다
공원에 모인 노인들이 장기를 둔다
비둘기들이 바닥을 쫀다
배식 봉사자들이 공원에 들어선다
카페 창가에 앉은 여자가 무언가를 끄적인다
서로 대화하며 웃는 남자들이 있다
꽃다발을 들고 카페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날의 영상은 여기서 종료된다
나는 죽은 친구의 마지막 편지를 꺼내 읽는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너에게 이런 편지를 적는 일도, 우리가 나눈 수많은 대화나 위로가 전부 쓸모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너는 한 번도 우리들을 앵글에 담으려 하지 않았지. 널 미워하지 않았어. 그러나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어.'
4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안대로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일찍부터 침묵을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그림자를 모른 척하려는 개처럼
엘리는 종종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잔 부딪히는 소리 유리 깨지는 소리
신경 다발이 끊길 때까지
세상은 점멸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흑백 세계에서 식물은 어느 방향으로 자라게 될까', 답장을 적으면서
우리 중 누군가는 선생 역할을 맡아
서로를 도와야 했는데
아무도 죽지 않고 우리가 완전했을 때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부축해 주며 차도 한복판으로
달려 나갈 때
우리의 내부를 가득 채웠던 마지막 선율이 무슨 곡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친구,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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